일본뉴스군함도강제징용

최근 영화화되어 일제시대 강제징용의 폐허를 적나라하게 그린 군함도. 몇 세대가 흘러도 군함도의 진실은 망망대해의 부유물이다.

일제 강점기때 해저에 묻힌 석탄을 캐기 위해 한국인 600명의 강제징용노동이 이루어진 군함도.
약 70년이 지난 현재에 이르러 폐허화 되었으며, 이 작은 고스트 아일랜드에 대한 관심이 다시 한 번 불을 지핀것은 일본에 의해 작년 6월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서부터다.

일본의 전근대적 산업화의 역군으로 활기를 띄던 이 작은 섬은 멀리서 보면 마치 군함처럼 보인다고 하여 군함도(軍艦島)로 불렸으며, 많은 기억의 유산을 남긴채 무인도로 변했고, 이를 기억하고자 기꺼이 유네스코는 군함도에 문화유산으로서의 지위를 안겨주었다.

하지만, 일본인 못지 않게 군함도에서 일본의 전근대적 산업화 역군으로 해저에 몸을 던진 이들이 있으니, 바로 일제시대의 조선인들이다.

일본의 문화재를 관장하는 정부기관은 한국측의 요구를 받아들여, 유네스코 등재와 더불어 조선인 강제징용 사실을 알리겠노라 공표한바 있다.

하지만, 일년이 훌쩍 지난 지금, 조선인 강제 노동의 현장이었던 것을 알리는 안내문은 보이지 않는다.

우리에겐 슬픈, 누군가에게는 거추장스러운 역사

최근 조선인 강제 징용의 슬픈 역사를 안고 있는 군함도(하시마)에 새로운 안내판이 세워졌다. 그러나 ‘조선인 강제징용’에 관한 언급은 전혀 없었다.

성신여대 서경덕 교수는 20일 ‘저번주 군함도와 가까운 타카시마에 다녀 왔다’고 하면서 ‘일본은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록 이후 군함도에 안내판 4개를 설치했지만 그 중에 가장 최근 세워진 것으로 보여지는 안내판에도 조선인의 강제징용에 관한 내용은 없었다’고 하였다.

대신 새로운 안내판에는 ‘군함도의 탄광은 메이지시대 일본의 산업 혁명 유산의 하나로 서양 산업명의 흐름을 받은 공업국으로의 토대를 구축했다’고 설명이 붙었다.
연대표기는 ‘1850년 부터 1910년 까지’가 메이지시대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일본이 유네스코 등록을 위해 약속한 것을 지키지 않았다는 것이 서교수의 지적이다.
일본은 당시 군함도와 타카시마 등의 등록을 신청할 때 연도를 ‘1850년부터 1910년까지’라고 한정하려고 했지만 한국과 국제사회가 반발하였기 때문에 강제 징용 시기 ’1940년~1945년’을 포함한 전체 역사를 알릴 것이라고 약속한 것이다.

서교수는 ‘일본은 등록 이후 어떠한 약속도 지키지 않고 있다.
새로운 안내판에 조선인 강제징용의 사실과 연도에 관한 시기를 강제징용이 종료한 1945년까지라고 표기하지 않고 있다’라고 하며 ‘이것은 강제징용을 숨기려고 하는 임시방편 책략에 지나지 않고 명백한 역사 왜곡’이라 강조한다.

군함도에 근린한 타카시마도 약 4만명의 조선인이 강제징용을 강요 받은 역사가 있지만 이 섬에 세워진 새로운 안내판에도 강제징용이라고 하는 단어가 보이지 않는것은 마찬가지.
서교수는 석탄자료관의 입구 좌측에 있는 연도표에도 강제징용의 시기를 완전하게 결락하고 있다고 증언했다.

서교수는 올해말까지 일본정부가 약속한 강제징용을 소개하는 정보센터 건립 등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지금까지 8회에 걸쳐 군함도를 방문하여 확보한 수 장의 사진자료와 영상을 유네스코측에 보내 ‘군함도의 세계유산 철회운동’을 전개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영화 군함도의 히트와 더불어 한일양국에서 군함도를 둘러싼 미묘한 공기가 형성되는 지금, 유네스코 등재 당시 공언했던 일본측의 약속이 성실히 이행될지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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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팬인포 편집부(kim-sh1104@worldjb.jp)